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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잔인한 세조를 엿볼수 있는-성주 세종대왕자태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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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 최고의 명당 자리임에 틀림이 없다

우리 나라 최대의 태실유적지인 세종대왕자 태실을 찾았다

 

 

아직은 많은 사람들이 찾지 않는것 같은데

태실생명문화공원이 조성되면 많이 찾을듯 하다

 

태실은 왕실에서 자손을 출산하면 그 태를 봉안하는 곳을 말한다. 예로부터 태는 태아의 생명력을 부여한 것이라고 인정하여 태아가 출산된 뒤에도 함부로 버리지 않고 소중하게 다루었다. 민간에서는 땅에 묻는 경우도 있었으나 많은 경우 출산 후 마당을 깨끗이 한 뒤 왕겨에 태를 묻어 몽긋몽긋하에 태운 뒤에 재를 강물에 띄워 보내는 방법으로 처리하였다. 그러나 왕족의 경우에는 국운과 직접 관련이 있다고 여겨 태를 항아리에 담아 전국의 명당에 안치시키는 방법으로 처리하였다. 이때 이를 주관하는 관상감에서 길지로 선정된 명산에 일정한 의식과 절차를 밟아 묻었는데, 이 의식과 절차를 거쳐 완성한 시설을 태실이라 불렀다. 또한 태봉은 태실 가운데 그 태의 주인이 왕으로 즉위할 경우에 격에 맞는 석물을 갖추고 가봉비를 세운 것으로 임금의 태실을 말한다.
19기의 태실은 화강암으로 깎은 조선태실 의궤(儀軌) 형식으로 지하에 석실을 만들고 그 안에 백자로 된 태호(胎壺)를 넣는 형태이다. 태호 속에는 태항(胎缸)과 태주(胎主)의 이름 및 생년월일을 음각한 지석(誌石)을 두었다. 지상에는 기단, 간석, 옥개의 형식을 갖춘 석조물을 안치하는 한편 각왕자의 태실을 가리키는 표석을 세웠다. 태실의 옥개 높이는 25㎝, 지름 1.6m, 둘레 3.2m이며 신석은 높이 60㎝, 지름 1.2m, 둘레 2.4m이다. 기단은 높이 45㎝, 지름 2.2m, 둘레 8.8m이고 태비의 높이는 90㎝, 너비는 35㎝이다. (VisitKorea 에서 인용)

 

성주군 월항면 인촌리 태봉(胎峰) 정상에 소재하는 세종대왕자태실은 세종대왕의 적서(嫡庶) 18왕자와 원손 단종의 태실 까지 도합 19기로, 그 조성 시기는 조선 세종 20년(1438)에서 24년(1442)사이다. 전체 19기중 14기는 조성당시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으나 세조(世祖)의 왕위찬탈(王位簒奪)에 반대한 다섯 왕자의 태실은 방형의 연엽대석(蓮葉臺石)을 제외한 석물이 파괴되어 남아 있지 않으며, 세조 태실의 경우에는 즉위한 이후 특별히 귀부를 마련하여 가봉비(加封碑)를 세워두었다. 1977년 태실에 대한 정비사업과정에서 분청인화문개(粉靑印花紋蓋), 분청인화문완(粉靑印花紋盌), 평저호(平底壺), 지석(誌石) 등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재질은 화강암이고, 형식ㆍ구조는 연엽형의 개첨석(蓋簷石, 하단 지름 102cm, 높이 42cm), 구형(球形)의 중동석(中童石, 높이 60cm), 석함(石函)으로 이루어져 있다. 태실 비문에 ‘○○(대)군명태장 황명연호연월일입석(○○(大)君名胎藏 皇明年號年月日立石)’이라고 음각되어 있으며, 세조가봉비의 비문은 멸실되었으나 『실록(實錄)』에 비문이 수록되어 있다.
우리나라에 있어 태를 봉안한 최초의 기록은 『삼국사기(三國史記)』의 김유신의 장태(藏胎)기록에서 확인할 수 있으며, 이후 고려의 왕실에서 태봉안 양식(胎奉安 樣式)이 성립된 후 조선시대까지 그 맥락이 이어진 오랜 전통을 가진 것으로, 태봉(胎峰)에 태를 봉안하기 위한 석물구성은 우리나라에서만 행해졌던 독특하고 독자적인 문화라 할 수 있다. 세종대왕자 태실은 왕과 태자에 대한 태실만을 조성하던 고려시대의 태봉안 양식이 변화하여 왕과 왕비 및 그 자녀의 태실을 조성하기 시작한 조선시대 최초의 왕자태실로 그 의미가 크다. 태실의 조성 및 조성시기에 대해서는 『세종실록』의 기록을 통하여 확인할 수 있으며,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의 기록에서 찾아지는 태실 관련 기록에서 언급된 산맥이 연결된 높은 봉우리가 아닌 들판에 홀로 우뚝 솟은 반구형(半球形)의 형태를 한 최적의 입지조건에 자리잡고 있다.
세종대왕자 태실은 우리나라에서 왕자태실이 완전하게 군집을 이룬 유일한 곳일 뿐만 아니라 조선시대 초기의 태실형태 연구에 중요한 자료라는 점, 그리고 고려에서 조선으로의 왕조교체와 함께 왕실의 태실 조성방식의 변화 양상을 볼 수 있다는 점에서 문화재적 가치가 높다.

( 경상북도 지정문화재 정보화 시스템에서 인용)

 

 

명당이다 ㅋ

 

 

 

 

 

 

 

 

 

 

 

 

 

 

부관 참시와 더불어 태실조차 없애려한 권력에 눈이 먼 사람들의 야욕의 결과를 그대로 본다

세조의 태실도 있었는데 비문에 글씨가 남아 있지 않다

 

 

인과응보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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