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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 경북 영천) 임고 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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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교가 지방의 국립 교육 기관이라면 서원은 쉽게 생각해서 사설 교욱 기관이다

 

 

조선 중기 이후 교육과 유교 성현에게 제사를 지내기도 했고

문중의 세를 과시하는 수단으로 활용되기도 했다

 

 

우리나라 서원이 몇개인지는 정확하지 않다

조사한 곳마다 다르고 국사 교과서에도 600여개로 소개 되고 있으나 사단법인 한국 서원 연합회에서는

전국에 648개의 서원 목록을 정리해 놓고 있다 ( 첨부 엑셀 파일)

 

한국서원현황.xlsx

 

또한 한국의 9대 서원으로 소수서원, 옥산서원, 도산서원,병산서원, 필암서원, 돈암서원,

도동서원, 남계서원, 무성서원꼽고 있다.

 

기회가 닿는 대로 향교와 함께 서원을 찾아 볼 생각이다

 

보현산 천문대 내려 오는길에 영천시 임고면에 있는 임고 서원을 찾았다

 

1992년부터 정화 사업을 시작하여 최근까지 이 일대 둘레길을 조성하는등

200억원의 예산을 들여 깔끔하게 단장을 했다 ( 적절한 예산인지 판단은 유보한다 )

 

( 임고 서원 )

임고서원은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1337~1392)를 추모하기 위해 1553년(명종 8) 부래산(浮來山)에

건립하여 1554년(명종9)에 사액되었다. 임란때 소실된 후 1603년(선조 36)에 현 위치로 이건하여

재사액(再賜額)되었다.

1643년(인조 21)에는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을 배향하고 1727년(영조 3)에는 지봉(芝峰) 황보인(皇甫仁)을

추향하였으나 1871년(고종 8) 훼철되었다. 현재는 포은·지봉을 봉향하고 있으며, 1992년부터는 서원정화사업을

시행하여 기존의 영역 우측에 대규모의 서원을 신축하였다.
포은은 1337년(충숙왕(忠肅王) 복위(復位) 6)에 임고면 우항동(愚巷洞)에서 일성군(日城君) 운관(云瓘)의 아들로

출생하였으며, 1360년(공민왕 9)에 문과에 장원하여 여러 관직을 두루 거쳤으며 왜구토벌에도 공을 세웠다.

지방관의 비행을 근절시키고 의창(義倉)을 세워 빈민을 구제하였으며 성리학에 뛰어났을 뿐 아니라

시문·서화에도 뛰어났다.

고려 삼은(三隱)의 한 사람으로 기울어져 가는 고려의 국운을 바로잡고자 노력하였으나

1392년(공양왕 4)에 이방원의 문객인 조영규(趙英珪)에 의해 선죽교(善竹橋)에서 피살되었다.

1401년(태종 1)에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익양부원군(翼陽府院君)에 추봉되었다.
일곽의 토장 안에 경앙문(景仰門), 강당, 유정문(由正門), 문충사(文忠祠)를 동일축선상에 배치하고 담장 우측에

존영각(尊影閣)과 관리사가 별도의 공간을 이루고 있었으나, 1992년부터 시행된 정화사업으로 인해 철거하고

우측의 대지에 별도의 서원을 신축하였다. 이 사업으로 인해 기존의 문충사는 신축한 서원으로 이건되었으며,

거기에는 존영각이 대신하여 자리하게 되었다.
강당은 정면 4칸 측면 3칸 규모의 맞배기와집이다. 평면은 가운데에 대청을 두고

양협칸에는 온돌방을 둔 중당협실형인데

전면에는 퇴를 깔고 계자각을 둘렀다. 사괴석 기단위에 막돌주초를 두고 원주를 세웠는데,

주상에는 무익공으로 처리하였고

대량 위에 파련대공이 마룻대를 받게 한 3량가의 구조이다.

( 경상북도 문화재 사이트에서 인용)

 

이곳에 오면 재현한 선죽교를 볼수 있고 경상북도 기념물인 500년된 은행나무를 볼수 있다

 

 

 

선죽교

북한의 국보 문화유물 제159호

정몽주가 이 방원에게 피살된곳.원래는 선지교였으나 피살된 날 밤 다리 옆에서 참대가

솟아 나와 이후 선죽교로 고쳐 불렀다

고려 시대에는 돌 난간이 없었으나 정몽주의 후손 정호인이 개성유수로 부임하여

선조의 유적에 우마차가 다님을 안타깝게 여겨 난간을 설치통행을 제한하고

그 옆에좁은 돌다리를 가설하였다 한다

선죽교란 글씨는 한석봉이 쓴 글씨를 탁본한것

 

 

은행나무 ( 경상북도 기념물 제 63호)

높이 약 20M ,가슴 높이의 줄기 둘레가 5.95M로 나이가 약 500년에 이른다

 

 

 

 

 

 

 

 

 

 

 

 

 

 

 

 

 

 

 

 

 

 

 

 

 

 

 

 

 

포은은 부모가 돌아 가셨을때 3년간 부모님의 여막을 지켰는데 이것이 3년상의 기준이 되었다

 

그 유명한 단심가와 백로가 앞에서 한참동안 그 의미를 새기고

또 새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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