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들과 묘골마을의 "묘운"을 찾았다가 잠시 육신사도 돌아보기로 했다
비가 내리고 있어 자세히 살펴 보지는 못했지만 눈도장이라도 찍고 간다
"묘운"이란 한옥 카페가 생겨 그 곳을 찾는 손님들이 이곳도 찾는 것은 좋은 일이다
☞ 육신사
육신사는 삼촌에게 왕권을 빼앗긴 어린 왕 ‘단종’의 복위를 꾀하려다 숨진 사육신으로 일컫는
조선 세조 때의 박팽년, 성삼문, 이개, 유성원, 하지위, 유응부 등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다.
취금헌 박팽년(醉琴軒 朴彭年) 선생만을 그 후손들이 모셔 제사를 지냈으나 선생의 현손(玄孫)인 박계창이
선생의 기일에 여섯 어른이 사당 문 밖에서 서성거리는 꿈을 꾼 후 나머지 5위의 향사도 함께 지내게 되었다.
그 뒤 하빈사(河濱祠)를 지어 제사를 지내다가, 숙종 20년(1694년) 낙빈(洛濱)이란 현액을 하사 받아 사액서원이 되었다.
고종 3년(1866년)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페령으로 낙빈사가 서원(書院)과 함께 철거되었으며,
1924년 낙빈서원이 재건되면서 위패를 다시 봉안하게 되었다.
이후 1974년부터 1975년 사이에 ‘충효 위인 유적정화사업’에 의해 현재의 위치에 육신사로 이름을 붙여
사당을 재건하였고, 2003년부터 2011년에 걸쳐 충절문을 세우고 전통가옥을 복원하였다.
사우건물인 숭정사에는 육신과 더불어 박팽년의 부친인 중림(仲林,?~1456년)의 위패도 함께
봉안되어 있으며 정면 5칸, 측면 3칸의 규모에 겹처마 팔작지붕으로 되어 있어 웅장한 느낌을 준다.
경내에는 이외에도 정면 5칸 측면 1칸 반 규모의 홑처마 팔작지붕인 숭절당, 태고정(보물 제554호),
외삼문, 내삼문, 홍살문, 삼층각 등이 있고 사당 앞에는 사육신의 행적을 기록한 육각비(1979년 건립)가 세워져 있다.
( 대한민국 구석구석에서 가져 옴)
사육신은 세조에게서 삼족의 멸문 지회를 당해 후손이 없는데 박팽년의 둘째며느리가
임신 상태에서 아기가 살아 남았고 그 아기가 사면받아 이곳에 터를 잡고 살게 되었다
☞ 보물 태고정
조선 성종 10년(1479) 박팽년의 손자인 박일산이 세운 별당건축이다.
지금 있는 건물은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 때 불타서 일부만 남았던 것을 광해군 6년(1614)에 다시 지은 것이다.
일명 ‘일시루(一是樓)’라고도 한다.
현재 대청에는 임진왜란 후 치찰사로 온 윤두수의 한시를 새긴 현판과, 정유재란 후 명군 선무관이 남긴 액자들이 있다.
☞ 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도곡재 (陶谷齋)
도곡재는 학생들의 공부를 위해 사용되던 집이다.
처음에는 조선 정조 2년(1778)에 대사성인 서정공 박문현이 살림집으로 세운 건물이나,
정조 24년(1800) 경에 도곡 박종우의 공부방으로 사용되면서 그의 호를 따서 도곡재라는 이름을 붙였다.
앞면 4칸·옆면 1칸 규모이며, 후대에 퇴칸을 달고 대청을 넓혀 누(樓)처럼 꾸몄다.
도곡재는 태백산지역 살림집의 일반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는 소박한 건물이다.
사육신들께서 많은 사람들이 찾아 오니 좋아하시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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